태조어진을 모신 경기전 입구
1410년(조선 태종 10년)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 경기전(慶基殿)은 조선 태조의 영정(影幀)을 봉안한 전각으로 있는데 준원전(濬源殿),
영희전(永禧殿)에도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경기전 관원으로는 영(令, 從五品) 1명, 참봉(參奉, 從九品) 1명이 배속되었다.
1442년(세종 24년) 전주의 어용전을 경기전으로 개칭하였다. 1971년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2호로 지정되었고.
1991년 1월 9일 대한민국 사적 339호로 승격, 2008년 12월 1일 보물 제1578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태종 10년인 1410년 창건되었다.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경내에는 보물 제931호인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화)을
모신 본전과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공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의 여러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등의 유적이 있다.
경기전은 사적 제339호로 지정면적 49,527.4㎡, 1410년(태종 10)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완산·계림·평양 등 세 곳에 창건하여
부왕인조선 태조의 어진(御眞)을모셨다.
1442년(세종 24)에는 그 소재지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集慶殿), 평양은 영종전이라 불렀다.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4년(광해군 6)에 중건하였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 본전 가운데에서 달아낸 헌(軒), 본전 양 옆 익랑(翼廊)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두르고 있는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등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있다. 본전은 남향한 다포식(多包式) 맞배집 건물로, 높게 돋우어 쌓은 석축 위에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세웠는데 건물 안의 세 번째기둥렬(柱列)에 고주(高柱)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단(壇)을 놓았다.
이 단 양 옆에는 일산(日傘)과 천개(天蓋)를 세웠다. 본전 앞에 내단 헌은 본전보다 한 단 낮게 쌓은 석축 기단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2익공식(二翼工式) 포작(包作)을 짜올린 맞배지붕 건물이다. 본전과 헌이 이루는 구성은 왕릉에 제사를 지내려고
세운 정자각(丁字閣)의 구성과 같다.
또한, 본전 양 옆에는 익랑(翼廊, 문의 좌우편에 잇대어 지은 행랑) 2칸, 무(廡, 전각 주위에 세운 행랑) 4칸이 있다. 내삼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된3문으로 그 양 옆에 익랑 2칸을 두었다.
외삼문은 앞면 3칸, 옆면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익랑을 두지 않았으며, 옆면 가운데에 사이기둥을 세워 삼문을 달았다.
현재 이곳에 있는 조선 태조 어진은 1442년에 그린 것을 1872년(고종 9)에 고쳐 그린 것이다.
경기전은 그 주변 일대와 더불어 사적으로 지정된 외에 경기전 자체의 건물만은 전라북도유형문화재제2호로 별도 지정되어 있었는데
1991년 1월 9일 대한민국 사적 339호로 승격되었고 2008년 12월 1일 보물 제1578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아산, 묘향산, 적상산 등으로 옮겨졌던 어진은 1614년 경기전이 중건되면서 다시 돌아왔다가
동학혁명 때위봉산성으로 옮겨져 화를 면했으며 현재 경기전에 모셔져 있는 어진은 1872년 서울 영희전의 영정을 모본으로 해서 새로 그린 것이다.
한옥마을 입구에 있으며 한옥마을을 찾은 여행객이 제일 먼저 들르게 되는 곳으로, 원래의 규모는 훨씬 컸으나 일제시대에 경기전의 서쪽 부지와
부속 건물을철거해서 일본인 소학교를 세우면서 절반 정도가 잘려 나간 것이다.
남아 있는 경기전 건물의 모습은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과 내삼문을 연결하는 간결한 구조다.
경기전, 오목대, 향교 등 중요 문화재와 문화시설이 산재한 전주한옥마을은 전주만의 독특한 생활문화공간이다.
이곳에는 조선 태조 어진을 모시고 있는 어진박물관
조경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