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라 도

전주오목대와 한벽루 설경

청하집 2011. 3. 2. 14:39

 

 

 오 목 대

 

한벽당과 전주향교의 북쪽 4차선 노변, 벼랑같이 솟은 언덕에 세워진 오목대는

고려 말 우왕 6년(1380년)에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돌아가던 중

 

 조상인 목조가 살았던이 곳에 들러 승전을 자축한 곳으로,

그 후 고종 황제가 친필로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가 새겨진 비가 세워진 곳

오목대에서 육교를 건너면 70m 윗쪽으로 이목대가 있는데 건물이 있는 80m 아래쪽에 비석과 비각을 세웠다.

 

이 비 속에는 목조대왕 구거유지라 새겨져 있는데 고종 황제의 친필이다.

목조는 조선조를 건국한 이태조의 5대조로, 목조가 어릴 때 이 곳에서 진법놀이를 하면서 살았던 유적지로 알려져 있으며,

 

그러한 내용이 용비어천가에도 나타나 있다. 목조가 당시의 전주부사와의 불화로 이곳에서 함경도로 옮겨간 것이 이성계로

하여금 조선조를 건국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으므로, 이를 하늘의 뜻이라고 여겼다 한다

 

  

왜구의 침입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고려 말기에는 일본의 정치.정세가 극도로 혼란하여

일본이 변경지방민을 통제하지 못했던 탓으로 노략질이 더욱 극심해졌다.

 

고려말엽에는 전국적으로 피해를 입었는데,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역의 내륙지방이 피헤사 심했고

   특히 심산유곡인 지리산 근처에서 까지 노략질을 하였다.  

 

 

1380년 지리산 근방의 사근내역(沙斤乃驛 : 함양)에 집결하고 있던 왜구의 잔당을 섬멸하기 위해서

고려는 이성계를 최고 지휘관으로 삼아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쪽의 정산봉(鼎山峰)으로 나아가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이 싸움에서 고려는 왜구의 말 1,600여 필을 얻고 기타 무기도 많이 노획했는데, 이를 황산대첩이라고 한다 

 

이 황산대첩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던 이성계 장군은 돌아 오는 길에 자기의 뿌리가 있는 이곳에 들러

전주이씨 종친을 모아 놓고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는데 술에 거나하게 취한 이성계는 춤을 추면서

중국의 한고조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불러 역성혁명을 통한 천하제패의 흉중을 드러 내었다.

                        때마침 이 자리에는 종사관으로 함께 한 포은 정몽주가 있었는데 이성계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나서, 홀로 말을 몰고 남천을 건너 지금의 남고산 만경대에 올랐다.

만경대 벼랑에서 정몽주는 멀리 북쪽 하늘을 우러르면서 스러져가는 왕조의 한을 석벽제영(石壁題詠)이란

한 수의 시에 담아 읊었다고 한다. 결국 고려의 충신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피살 되었다.

 

 

 

 

 

 

 

 

    한 벽 루

  

 전주천변에 있는 한벽루는 유생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전주8경 중 하나이다.

예전에 물이 많던 시절에는 한벽청연(寒碧晴煙)이라 하여 한벽루 앞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서서히사라져 가는 모습이

 절경이라 하였으며, 향교와 오목대가 또한 가까워 전주의 선비들이 이곳에서 전주천을 바라보며 풍취를 즐겨왔던 명소였다.

 

 한벽루의 중앙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면 큰 산이 있는데, 그 산은 전주의 조산인 고덕산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집을 지을 때 어떠한 곳을 바라보게 할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집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외국사람의 경우 밖에서 건물을 바라볼 때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더 많이 생각하고 집을 지었다고 한다.

한벽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8짝 지붕의 형태로 정중앙에서 바라보이는 전주의 조산인 고덕산과 그 산 좌우를 잇고

있는 산 능선의 산 태극과 한벽루의 앞을 돌아나가는 전주천의 물 태극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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